종종 어떤 글을 보면 나도 따라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러한 감정은 장르나 작가의 경력, 유명세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예전에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를 읽다가도 그랬고, 윤가은 작가의 에세이 '호호호'를 보다가도, 최근에는 장일호 작가의 에세이 '슬픔의 방문'을 보다가도 그랬다. 그럴 때 글을 쓰면, 꼭 그 작가의 말투를 따라하는 것만 같은 평소와는 다른 어투가 구사된다. 글의 분위기에 심취해버려서 마치 나도 원래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인 양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책을 읽고 일주일 쯤 지나면 알코올 마냥 증상이 싹 사라지고 다시 원래의 습관이 돌아온다.
언젠가는 누군가의 글을 읽고 영향 받아 쓰는 글은 좋은 글이 아니고, 나만의 글투를 개발 또는 발굴하여 써야 한다고 굳게 믿었었는데,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내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누군가의 글을 따라 쓴다고 해도 그 사람만이 가진 고유의 실력에는 발톱의 때만큼도 따라갈 수 없을테니 걱정 말고 일단은 써보자는 생각으로. 글쓰기는 체력과도 같아서 날마다 하는 유산소 운동이 귀찮기는 해도 짧게나마 꾸준히 하면 체력이 느는 것 처럼, 글 근육도 날마다 짧게라도 써야 생긴다고 한다. 나는 날마다는 무슨 3일 연속도 쓰기 힘들어 하는 사람이니, 좋은 글을 읽고 쓰고싶다는 생각이 들 때만이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이슬아 작가의 2018년 연재물을 엮은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보며 글을 쓰고픈 기분이 들었다. 이슬아 작가의 이름은 온라인 서점에서 이미 많이 보았다. 국내 내로라하는 젊은 작가들 사이에 꼭 한 자리 차지하고 글을 싣는 그의 입지를 보면서 분명 글을 잘 쓸 거라고 예상했었다. '이슬아'라고 검색하면 뜨는 그의 사진들도 있는 그대로인듯 하면서도 굉장히 개성 강한 분위기를 풍기므로 글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만 했다. 그동안 그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직장 동료가 자신과 자신의 딸이 이슬아 작가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했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도 출간 당시 사두고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아서 읽지 않다가, 방 한 구석에 내몰려 있다가 본가로 보내버렸었지.
그러다가 갑자기 왜 읽게 됐지? 모르겠다. 왜 갑자기 마음이 동해서 종이책이 있는데도 전자책 버전을 또 구매한 건지. 그러고 보면 며칠 전 코로나에 걸리고 약기운에 취해 이틀 내내 잠만 자다가 무언가 텍스트를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정신을 차리면서였던 것 같다. 깊이 생각하고 읽을 만한 책들은 텍스트가 눈에 들어오다 곧 흐려져버렸고, 그냥 조금 가볍고 재미있게 읽을 만한 텍스트를 떠올렸다. 가벼운 에세이. 그게 바로 이슬아 작가의 책이었다.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첫 이야기를 읽었는데 오히려 번뜩 정신이 들었다. 헉. 이 책 뭐지? 이 도파민 도는 글은 대체!?
한 챕터만 읽자고 했던 마음은 어느덧 잊혀지고, 다음, 다음, 또 다음으로 넘어갔다. 자신의 연인을 묘사한 글들도 굉장히 흥미로웠지만 할아버지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이렇게 자세하게 묘사하다니. 부모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허물 없이 낱낱이 나눌 수 있다니. 읽으면서 새삼 깨달아버렸다. 이슬아 작가의 글 실력은 재능이라고. 노력을 무시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언젠가 어느 유튜브 채널에서 그가 집에서 연재하며 밤마다 고뇌하는 모습도 보았고, 그가 쓴 글을 통해서도 글쓰기를 배우러 이곳 저곳 경험했던 이야기도 알게 됐으니까. 하지만 기본적으로 재치있고 재미있게 쓰는 입담은 재능에서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학창시절 교실 풍경을 떠올려보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입담이 엄청나서 주변 사람들을 자꾸만 웃기는 친구가 있는 것처럼.
자세하게 글을 쓰는 것도 능력인데 거기에 재치까지 있다니 참 멋지다. 오랜만에 또 책에 반해버린다. 이번 달은 코로나도 걸렸거니와 위염에 추위에 꽤 게으르게 산 것 같은데, 또 귀한 책을 만나다니 행운이다. 아마도 이슬아 작가의 책을 며칠 내로 읽고 곧 떠나는 대만 여행길에서도 읽지 않을까. 빠질 수 있는 곳을 찾아 행복한 마음이다.